도시에서 오대산 전나무 숲을 품는다는 것 | 최원형
월정사, 영동고속도롤 타고 강릉으로 향하는 길에 늘 이정표만 구경하고 지나쳤던 곳이다. 작년 여름 우연한 기회에 월정사 입구까지 갔지만 인연이 닿질 않아 돌아서야 했다. 이번에 전나무의 기억만 들고 찾아간 월정사는, 초입에 전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쭉쭉 뻗어 올라간 전나무들이 숲을 이룬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도 글로 느낌을 헤아리기도 벅찬 감동을 줬다.
월정사가 자리한 오대산은 다섯 산봉우리가 연꽃봉오리처럼 포개어져있는 형상이라 한다. 구불구불 부드러운 봉우리가 연꽃 한 송이를 피어 올린 형세라니 오대산이란 이름에서 남다른 기운이 전해져온다. 기암괴석이 많은 설악산과 달리 흙이 풍부한 할머니같이 인자한 산이 바로 오대산이다. 흙이 풍부하다보니 숲이 울창하고 그 안에 품고 있는 생명들도 무척이나 다양하고 풍성하다. 전나무 숲도 이러한 오대산의 특성이 그대로 살아있어, 전나무 아래로 자잘하게 앙증맞은 꽃들이 숲 바닥에 점점이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숲 가장자리로 초롱꽃이 보이고, 양지바른 곳에는 붉은 토끼풀과 엉겅퀴가 있었다.
깊은 산속의 서늘한 기온 탓인지 금낭화가 7월초인데도 여전히 꽃을 달고 있었다. 자주색 입술모양의 꽃이 돌려가며 돋아난 꿀풀은 숲 바닥에서 벌어지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았다. 함박꽃나무에 아래를 내려다보며 수줍게 핀 꽃 한송이는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만난 듯 반가웠다. 다섯 줄 무늬가 꼬리 끝까지 선명한 다람쥐는 잠시도 가만있질 않고 몸을 놀리더니만 거목의 뿌리 아래 구멍으로 재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잔잔한 오후 숲에 잠시 파문이 일고 지나간다면 꼭 그러할까.
평일 오후시간이라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한 숲이지만 그곳에 사는 생명들은 끊임없이 삶을 살아내느라 분주했다. 그들의 분주함이 건강하게 전해져올 때면 내 마음은 참 즐겁다. 가슴 깊숙이 신선한 공기를 심호흡하며 전나무 숲길을 걷다가 눈에 띈 것은 계곡 쪽에 서있는 전나무들의 가지였다. 길이 난 곳은 휑하니 넓은 공간인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가지를 떨구고, 계곡 쪽으로만 무성하게 가지를 뻗고 있었다.
나무는 공간이 여의치 않거나 뿌리의 생육상태가 적절하지 못할 경우 가지를 포기한다. 휑하니 넓은 길은 가지를 뻗을 공간이 충분한데도 전나무는 계곡 쪽으로만 잔뜩 가지를 뻗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혹시 전나무의 뿌리는 안녕하신지 우려스럽다. 전나무숲길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찾다보니 길 밑으로 뻗어 있는 전나무 뿌리가 피해를 입고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또 다른 추측은 계곡 쪽으로 들어오는 빛이 풍부하다보니 그곳으로 가지를 많이 뻗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빛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 식물을 이해하는 알파이자 오메가이니까.
벼린 칼날로 썬 듯이 정리되어 있는 전나무 숲은 그 반듯함이 그대로 아름다움이었다. 전나무의 매력에 한껏 취했다 빠져나올 즈음 그 숲길을 걷는 내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넓고 선명하게 탁 트인 숲길을 걷는 동안 들었던 작은 아쉬움은, 숲 안쪽으로 갈라지며 구불구불 난 오솔길을 보게 되면 금세 충만함으로 바뀌었다.
이 느낌이 무엇 때문인지 모른 채 전나무 숲길을 걷다가 한 번씩 곁가지처럼 새는 오솔길을 두어 개 쯤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전나무 숲길은 너무 깨끗하게 흙으로만 되어 있었다. 그 흔한 질경이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숲길에는 풀이 동무해야할 것만 같은데 너무나 말끔한 흙길은 자꾸 아쉬움이 일었다.
많은 이들이 사계절 가리지 않고 전나무 숲길엘 꾸준히 오간 덕분일까. 시골 마찻길은 경운기가 지나다녀도 그 바퀴자국을 뺀 나머지 흙길에 풀들이 쉴 새 없이 자라는데, 이 전나무숲길은 유난히도 깨끗한 흙길이다. 숲길이 흙으로 포장되어 정갈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숲길에 풀이 있다면 훨씬 자연스러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갈한 느낌과는 대조가 되는 풍경도 있다. 구새를 이룬 채 버섯이 만발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중인 나뭇등걸이 눈에 띄었다. 두 아름은 족히 됨직한 전나무 줄기가 쓰러져 있는 모습도 숲 길 너머 숲 안쪽에서 종종 보였다. 전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리는 나무가 아니어서 쭉쭉 위로 뻗다보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진다.
그들의 삶인 이런 모습을 전나무 숲에서 자연스레 만나는 일은 생과 사가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어 좋다. 유기물이 빠져나가 푸석푸석해진 썩은 고목의 가지도 보였고, 관중을 비롯한 양치식물들이 저 멀리, 사람의 발걸음에서 멀어진 숲 바닥에 지천으로 나고 자라고 있었다. 숲이 살아있는 생생한 느낌을 받았다. 떠들썩한 봄이 지나고 여름이 깊어가는 7월의 숲은 들리지 않는 그들의 떠들썩함으로 인해 한껏 좋았다.
오후 다섯 시 무렵, 산중은 일찍 해가 진다더니 어둠이 살짝 내리비치는 듯했다. 숲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 물소리도 때론 잊고 전나무의 기개를 감탄하며 바라보다, 저쪽에서 신발을 손에 든 채 맨발로 걸어오는 어르신을 한 분 만났다. 느낌을 여쭈었더니 시원하고 좋다 했다.
‘참 좋아요. 아, 이걸 꼭 해봐요.’ 그 어르신이 지나가고 곧이어 서너 명의 꼬마들이 역시 맨발로 다가왔다. 그들은 내가 있는 곳까지 오기도 전에 오래된 전나무 등걸을 만나자 모두들 그곳에 ‘풀썩’ 주저앉았다. 표정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아이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맨발로 걸은 느낌을 묻자, ‘아파요. 따가워요. 싫어요.’했다.
여리디 여린 아이 발바닥과 굳은살로 단단해진 어른 발바닥, 그 차이가 천양지차의 다른 느낌을 줬을 거라 생각한다. 같은 경험을 하고도 처지에 따라 각자가 느끼는 바가 얼마나 다른가를 확인하고 나니, ‘안이비설신의’에 의지해 내가 경험한 것만이 옳다고 우겨대던 내 지난 시간이 참 부끄러웠다.
다음 날, 오전에 다시 월정사를 찾았다. 월정사 경내 뒤란은 그대로 산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자연의 경관을 그대로 이용한다 했는데 월정사 역시 사찰이 들어앉은 주변 산의 형세를 그대로 두어서 자연스런 아름다움이 참 좋았다. 개망초와 마거리트를 닮은 국화과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사이로 작은멋쟁이나비, 네발나비가 춤추듯 꿀을 따며 날아다녔다. 풀숲은 한낮의 짱짱한 햇살과 내기시합을 벌이기라도 하듯 풀벌레들 소리로 요란했다.
내친걸음,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버스가 덜컹거리는 그 길은 요란하기 이를 데 없었고 엉덩이가 고역이긴 했지만, 속도를 낼 수 없는 그 길이 무척 고마웠다. 잘 닦인 숲속 도로는 로드킬이 숱하게 벌어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덜컹거리며 속도를 내지 못하는 덕분에 동물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오가는 그 길이 우리가 기꺼이 감수해야하는 불편함으로 오래 남길 바란다.
숲에 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게 있다면 편안함 혹은 안정감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문명과 일정하게 거리를 둔 숲은 바짝 조였던 마음을 한없이 헐겁게 해준다. 남과의 경쟁이 없다면 정서적 안정감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간이 누리는 것의 편리함, 안락함의 결정체를 문명이라 한다면, 그것은 또한 언제나 최고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전제된 산물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 욕망이 깔려있는 문명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숲에서 사람들이 안정감을 얻는 건 어쩌면 욕망이 제거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숲은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살아오고 있는 수많은 식물과 동물의 터전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인간이 최고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뭔가 최고이고 싶은 욕망이 작동할만한 꺼리가 있을까.
붓다께서 고통이 생겨나고 소멸되는 방법을 말씀하셨던 사성제의 첫 번째가 번민의 결과를 직시하는 고제인데, 그 괴로움의 시작은 욕망이다. 괴롭고 싶지 않다는 욕망마저 지니고 살다가도, 희한하게 숲에 이르면 그 어떤 욕망의 찌꺼기도 말끔하니 사라진다. 참 묘하기 짝이 없다. 숲은 그 자체로 큰 가르침을 주는 스승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란 종교도 여타의 종교와 달리 숲에서 생겨난 종교다. 그래서 산중 고찰에 오면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함이 마치 외갓집에 온 느낌처럼 일어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연 속에서 한껏 평화로움을 느끼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면 나는 또 이 자연을 그리워할 것이다. 영성어린 자연과의 교감,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자연에 있을 땐 무한할 것 같다가도 막상 도시로 가면 다시 자연을 그리워할 뿐 자연과 나누었던 교감을 꾸준히 잇기가 쉽지 않다.
도시에서 만나는 플라타너스 가로수에서 왜 전나무 숲에서 느끼는 만큼의 교감을 얻을 수 없을까. 나도 그리고 그대도 자연의 일부인데. 어쩌면 내게는 관념 속에 그려놓은 자연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오대산을 떠나 서울 한 복판에 있어도 오대산 전나무 숲을 느낄 수 있는 힘은 뭘까. 습관처럼 살아지는 관념 속의 삶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깨어있다면 곧 가능할 듯도 싶은데 말이다.
최원형 | 생태 글을 쓰고 강의합니다.
# 에코붓다 소식지 2013년 7월,8월 호에 실린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