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으로 하루를 여는 지벤린덴의 공동체 삶
2007.07.24 15:18:29
제량스님
2004년 8월 16,17일 1박2일 동안 생태공동체 지벤린덴(Sieben Linden)에서 머물렀다. 초행길이었지만 지도와 안내시스템이 제도적으로 잘 되어 있어서 버스종점인 시골동네까지는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도 시골은 사람이나 공중전화가 눈에 빨리 들어오지는 않았다. 우연히 우리를 안내할 가비(Gabi)라는 여인을 소개해 주었는데 친절하고 해맑은 이 청년은 이곳에서 어린이 환경교육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가비(Gabi)의 친절하고 따뜻하 안내로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 처음 도착한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 버려진 LPG 가스통을 뒤집어 종을 만들어 달아 놓았다. 나무막대로 두드려 식사시간을 알리자 구성원들이 모두 공동의 공간으로 모였다. 음식을 담기전 다함께 노래를 부르고 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서 여기저기 앉아 아주 자유로우면서도 조용하게 식사를 한다. 식단은 순 야채로만 차려져 있었다.
이곳 생태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은 명상과 채식인 것 같았다. 모든 구성원들이 각각의 개성과 성향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조화롭게 화하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여러가지 시설과 시스템을 친환경적으로 설치하기는 쉬워도 다양한 개인이 한 곳에서 공동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깊은 삶의 통찰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만큼 어렵다. 이들은 자신을 늘 바라보려고 하는 명상을 매일매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우주의 중심, 삶의 중심에 서 있으면 주병과의 조화는 자연스럽게 잘 이루어 낼 수 있다. 또, 채식을 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먹거리 이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채식은 사람을 유순하게 하고 따뜻하게 한다. 때문에 여러 다양한 성격들을 포용 할 수 있는 힘이 증장된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저녁에 모여 함께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며 마음 나누는 모습은 이들 공동체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었다. 명상과 대화, 채식 이 세가지가 평화롭고 행복한 공동체 유지의 원동력이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이 곳 공동체에서는 많은 다양성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은 약 80명이었는데 각각의 개성이 존재하는 모습이 자유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 것은 서로의 의견을 귀 기울어 들어주고, 존중하고, 문제점을 함께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한 예로, 우리는 “공동체에서 잘못된 행위, 또는 공동체의 규칙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사람을 추방하거나 어떤 제재를 가한 적이 있었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나 우리를 안내해준 가비(Gabi)라는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상황에 따라 틀리겠지만, 처벌이나 제재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잘잘못을 가려서 그 사람을 내보는 것이 우리의 할일이 아니라, 우리는 그 사람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왜 그와 같은 일을 하게 되었는지, 함께 그 문제를 해결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라고 했다. 진정으로 도와주고 위해주는 방법은 추방이 아니라 함께 덜어주고 나누어 갖는 것이다.
대화가 단절되고 서로의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는 폐쇄적 집단은 서로 의심하고 분쟁하여 결국은 껍데기만 있지 진정한 자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 특히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를 발휘하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주면서 그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세상은 나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나의 행복이 이 세상의 행복이고 세계의 행복이 나의 행복으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을 연 대화와 자신을 늘 살피는 명상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생명인 대화와 명상이 자연스레 늘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기본 토대가 잘 갖추어진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배울 점이 몇 가지 있었다. 평소에 건축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 공동체가 더욱 반가웠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친환경적 건축이라고 하면 옛 것을 먼저 떠올린다. 초가집, 시골집, 전통사찰건축 게다가 거기에는 불편하고, 지저분하고,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공간의 생활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공동체 정서는 이런 것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편리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건축물의 재료는 대부분 나무, 흙, 짚 등 모두 자연에서 빌려온 것들이었지만 집짓는 과정이나 시설물 하나하나는 과학적이고 기술적 섬세함이 돋보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생활은 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하 온수와 실내에서 물을 사용하지 않고 볼 일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퇴비화 화장실을 이용하는 자연그대로의 생태적 삶 그 자체였다.
우리가 방문한 기간동안 3층으로 된 나무 집을 짓고 있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이간의 두뇌와 기계를 적절히 활용해서 만든 짚벽돌과 흙별돌 그리고 물과 적당히 잘 배합된 진흙과 나무만을 주재료로 하여 집을 짓고 있었다. 설계도를 함께 보면 의견을 나누는 모습, 짚 벽돌 위에 기계를 이용하여 진흙을 쏜 후 미장하는 모습, 꼼꼼하고 섬세하게 마무리 작업하는 여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붕은 흙으로 만들어 구운 기와를 사용했는데, 이 기와는 서로 맞물려 걸릴 수 있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에 50년에서 100년은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친환경적인 재료만 사용했느냐, 그것은 아니다. 비상계단 부분만은 화재를 대비해서 시멘트 벽돌로 만들었다고 했다.
우리에게 친환경적인 삶이 원시적인 삶을 살아가자는 말이 아니듯, 친환경적인 삶의 일부에 약간의 융통성을 보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저것이로구나! 인간은 자연 속에서 문화를 창조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무를 나무 그 자체로 두는 것도 아름다움이지만, 다듬고 조각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삶에 유용하게 하는 것은 인간만이 하는 특권이다. 하지만 인간의 특권을 우리는 너무나 함부로 휘둘렀고 과욕으로 무분별하게 닥치는 대로 자르고 다듬어 소유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이제는 자신의 삶이 위협받고 있으며 발 딛고 설 땅마저 잃어 버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변 생명과의 과계를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나와 다른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는 생명은 그 어느 것도 없으며 모든 생명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소유하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행위인가.
이들의 집은 소박했다. 높이가 낮고 단순하게 만들어진 나무침대 그리고 짜투리 나무들을 이용한 책장, 옷걸이 등 작은 것을 잘 이용한 섬세함이 묻어 있었다.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나무로 다 이용하였지만 과욕을 부리 화려한 것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단 적절히 잘 조화된 그들만의 정치한 기술은 눈 여겨 볼 만했다. 이들의 건축에서 서양의 이성이 적절히 첨가된 섬세한 기술을 보았으며,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동양적인 정신세계를 볼 수 있게 되어서 또 한번 느낀 바가 많았다.
이 공동체에서는 매일 아침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상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을 하고, 공동의 작업을 하기 전에는 모두 손을 잡고 명상을 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일에 임하는 모습을 직접 볼수 있었다. 또 명상하는 장소 또한 다양하게 만들어 놓았다. 전통 몽골식으로 지어놓은 둥근모양의 큰 텐트 안에는 짚 벽돌로 의자를 만들어 앉아서 명상할 수 있도록 해 두었고, 나무를 일렬로 심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대나무 같은 나무를 원으로 심어서 나무들의 맨 윗부분을 서로 머리를 묶듯이 묶어서 여름 명상 장소를 만들어 놓았고, 또 다른 기타 장소는 처음부터 그 곳에 있던 나무나 호수를 그대로 두고, 개인이 혼자서 명상하고 싶을 때, 또는 무엇인가를 기원하고 싶을 때 갈 수 있도록 신성한 장소도 만들어 놓았다. 다음날 아침 안내자는 새벽 6시에 그 몽골식 텐트 안에서 명상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배려해 주었다. 이른 아침의 명상을 통해 오래간만에 평화를 맛볼 수 있었고 그동안의 지친 여독도 말끔히 씻어 내었다. 더 좋은 것은 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다.
음식이 우리 입에 들어오기까지 지극한 노력을 기울이고 깨끗하게 하듯이 우리 몸에서 나온 배설물도 어머니의 땅인 대지에 내 보낼 때는 똑같이 우리는 최선을 다해 깨끗하게 내 보내야 한다. 이곳에서는 나를 위해 사용한 물(목욕한 물, 요리한 물)을 리드베드시스템으로 정화하여 밭에 내보내고 있었고 해우소에서 나온 배설물도 퇴비를 만들어 땅으로 보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수세식 화장실이 없었다. 오늘날 수세식 화장실은 내 눈앞에서는 깨끗하게 위생적으로 처리되고 있지만 땅과 하천 바다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다. 나의 무심한 행위가 뭇 생명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생태뒷간은 나와 더불어 모두를 살리는 뒷간이다. 이곳의 뒷간은 부러울 정도로 생태적인 뒷간이었다. 실내에 있는 퇴비화 화장실은 냄새도 나지 않았고 해충도 별로 눈에 뛰지 않았다. 특징적인 것은 대소변의 분리였다. 그래서 남녀모두가 앉아서 볼일을 봐야한다. 분리된 배변은 숲 속에 있는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지은 나무집 속에서 구수하게 퇴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깨끗하게 거름이 되기까지 약 1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깨끗하게 만들어 내보내는 이들의 시스템이 결코 어렵거나 힘든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마음이 땅에 대해 하천에 대해 기본적인 예의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음식을 남기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자기가 먹은 그릇은 직접 씻어서 마른행주로 닦아서 제자리에 두고 나갔다. 접시를 씻을 때 물론 세제를 사용하지 않고 밀가루 탄 허연 물이었다. 식생활 대부분이 채식을 하고 있었다. 강제성을 띠는 일은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육식이 먹고 싶은 사람은 개인적으로 또는 몇개의 그룹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주방에서 해 먹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밭에서 직접 기른 채소들로 식사를 했다. 채소밭에 가보니 농약병이나 비료봉투는 그 어디에도 없었고 벌레 먹은 잎채소와 둘레에 아주 작고 찌그러진 과일나무를 볼 수 있었다. 밭가에는 잡초를 베어서 모아 둔 거름무더기가 여기저기 있었으며 똥거름도 적절히 잘 활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 공동체의 밭과 말이 있는 장소로 산책을 할 때, 산책길에 심어져 있는 우리나라의 산딸기와 비슷한 열매를 많이 따먹게 되었다. 나는 건강에 좋고, 특히 여성들에게 좋은 것이니 많이 먹으라고 했을 때, 안내자 가비(Gabby)는 “우리는 많이 안 먹어도 될 만큼 이미 충분히 건강하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만족할 줄 아는 아름다움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갖추어져 있음에도 더 많이 소유하려는 끊임없는 과욕으로 자연을 확대하고 착취해왔다. 그리고는 자연에게 되돌려 주는 것은 폐기물이라는 쓰레기뿐이었던 것이다. 필요한 만큼만 얻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 놔 둘 줄 아는 여유와 소박한 생활,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하는 삶이 아닌가?
또한 그들은 주변의 지역사회와의 연계성을 아주 중요시했다.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섬과 같다는 것이다. 지역의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자유롭게 찾을 수 있고, 함께 나누는 프로그램이나 시간들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개발한 친환경적 시스템을 지역주민들에게 나누기도 하고 지역어린이들에게 환경교육도 실시하고 있었다. 그 고장의 주요 현안에 대해 주민들과 함께 캠페인도 벌인다고 한다. 또한 친환경 음식물을 파는 가게도 있었는데, 그 가게에는 주변지역에서 생산한 유기농산물들을 대부분 들여와 판매한다고 한다. 이처럼 그들은 그들 공동체 그 자체만으로 그녀가 비유한 것처럼 마치 섬처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의 화합과 유기적 연관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몇 가지로 그들의 생활을 조금 엿보았다. 이 짧은 시간동안 그 공동체를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이성적인 서구문화에 동양적 정신세계의 만남이 잘 조화되어 꾸려나가는 공동체였다. 다양한 종교와 계층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모스이 여유롭고 평화롭고 보이는 이유는 아마 매일매일 일을 할 때나, 생활 속에서 명상을 하고 서로의 마음을 끊임없이 나누려고 하는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들의 공동체가 생태공동체라는데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안내자의 눈빛을 통해 분명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공동체를 가꾸어 가고 있었다. 이 생명공동체는 공동체의 삶 속에서 얻은 작은 행복을 지역사회와 나누고 있었고 또 그들의 행복과 평화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지향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는 장이 되어 주고 있었다.
이 공동체의 삶의 모습은 나에게 아주 큰 거울이었다. 이틀 동안 함께한 시간들이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접시에 담겨져 있는 음식 앞에서 합장하고 기도하며 말없이 먹었던 일, 천막 명상실에서의 명상, 인분을 모아 거름 만들기에 아주 좋은 소나무 숲, 각종 야채와 해바라기꽃밭과 밀밭, 짚 벽돌과 진흙으로 땀 흘리며 집짓기에 열심인 남녀 청년들의 모습, 개인의 공간과 공동의 공간이 자유롭게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집들, 더 넓은 들판에 뛰어 놀던 어린아이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모래 놀이 공간들, 해맑은 웃음으로 우리들에게 환송의 노래를 불러주신 어르신들, 푸른 눈 깊이 명상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우리의 안내자 가비(Gabby). 이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거울이었고 나를 성찰하게 했다.
불교 수행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우리에게는 장점도 많지만 아쉬운 점도 많이 있다. 가장 절실한 것은 대화이다. 서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나를 열고, 남의 소리에 귀 기우려 들을 줄 아는 자비심과 인내가 아닐까? 또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깊은 명상에서 가능하다. 이제 넉넉한 마음으로 대화하면서 내 주변의 사람들과 먼저 화해하고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을 해야겠다.
소식지 2004년 9,10월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