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쓰는 게 아니라 잘 쓰는 게 핵심이다 | 최광수
최광수 | (사)에코붓다 대표, 경상대학교 교수
방배동에 있는 윤 에코보살의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의 첫 느낌은 소박함과 옛스러움이었다. 가재도구는 낡았고, 정성과 손때가 묻은 소품 하나하나가 추억 속의 그림들과 어슷비슷 겹쳐졌다. 깔끔함과 세련됨, 현대적인 감각이 꽉 들어찬 공간 속에서 생활하다가 방문한 낡은 공간이 주는 낯설음이 약간의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는 윤 에코보살의 안내를 받으며 차츰 편안해졌다.
무더운 날씨에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편안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치열한 에코보살의 내공이 느껴졌다. 그녀가 흔들고 있는 부채도 헤진 가장자리를 종이로 덧대어 독특한 모습이었다. 우리 생활 속에서 이런 모습은 쉽게 볼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에코보살의 살림은 모두가 그러했다. 이사 갈 때 낡은 것을 모두 갖다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우리의 습성은 낡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우리의 몸이 낡고 늙어가는 것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태가 아닌가.
에코보살은 이 시대의 선지식이다. “내가 어떻게 선지식이 될 수 있느냐. 나는 지식인도 아니고, 깨달은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라며 손사래를 치겠지만, 작년 여름 전국을 누비며 만난 에코보살들은 선지식으로서 감동과 깨달음,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고 있는가? 편안함과 풍요로움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해결사인가? 조건과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당당한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없는가? 함부로 쓰고 함부로 버리는 우리의 생활방식은 지속가능한가?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은 궁핍한 것인가?”
행복한 웃음으로 방문단을 맞아주고 자신이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에코보살들이 우리에게 던져준 화두였다.
우리 인류는 심각한 상황에 맞닥뜨려 있다.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환경재해가 급증하고 있으며, 에너지와 자원의 고갈이 현실화되어 미래가 위협받고 있다. 환경파괴와 자원고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술적 대안들이 마련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인류가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생활양식의 실천이 보편적으로 확산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과 인생관의 정립이 필수적이다. 그런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는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 확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발적 가난’, ‘단순한 삶’, ‘느린 삶’을 주제로 한 다양한 사례들이 발굴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파되면서 일반 시민들의 지속가능한 삶의 지표와 모델이 되고 있다. <즐거운 불편>, <노임팩트맨> 등의 저서를 통해서도 새로운 삶의 모습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와 삶의 방식이 보여준 공통점은 자발적 가난이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생활 방식이 결코 우리 삶을 초라하거나 구차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이다.
윤 에코보살의 이야기에서도 이런 사실은 그대로 드러난다. ‘생활비를 절약하고 물건을 아껴 쓰기 위해 온갖 궁리를 하는 가운데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으는 습관이 생겼는데, 결코 불안하거나 구차하다거나 물건에 대한 갈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물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사용하는 매 순간 자신의 상태에 깨어 있으면서 주관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판단하고 선택함으로써 ‘내 행위의 주인’이 되는 과정인 것이다.
윤 에코보살은 또 말한다. ‘안 쓰는 게 아니라 잘 쓰는 게 핵심이다’ 물질 풍요의 시대에 정신없이 다른 사람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많이 쓰려고만 하는 것도 잘못 된 것이지만, 무조건 안 쓰기 위해 자린고비가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모든 물건은 제 자리가 있고, 적절한 쓰임새가 있다. 종이 한 장도 저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에 글자 몇 줄 적었다가 그냥 버려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쓰임새가 다할 때 까지 쓰고 또 쓰고 지독히도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잘’ 쓰고 ‘잘’ 사는 길이 아닐까.
모든 물건이 갖고 있는 본래 가치가 잘 드러나도록 훼손되지 않도록 오래도록 쓰면서 사람과 물건이 서로의 존재에 기대어 행복감을 느끼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면 나도 행복하고 물건도 행복하고 우리의 관계도 아름답게 유지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게 산다면 우리의 후손들도 그렇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로부터 고통 받지 않으면서.
소박함이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스스로 선을 긋는 능력으로서, 한계에 도달한 경쟁 사회에서 마치 수레바퀴 속의 햄스터처럼 기능하는 대신에 자신의 삶과 소비에 의식적으로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해내는 것인 동시에 지금 이것들을 사들인다고 정말 행복해질 것인가 하고 자문해보는 것”이라고 한 레기네 슈나이더의 말처럼 풍요 속의 빈곤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박한 삶은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사회시스템과 타인이 만들어놓은 틀대로 살아가지 않고 관찰하고 탐구하고 실험하는 삶인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에코보살들이 한명 두 명 늘어가고 있는 것에서 우리는 또 다른 희망을 본다. 언 땅에서 파릇한 새싹이 올라오듯이. 들판에 번져가는 쑥을 좇아 우리의 걸음은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여러분들과 함께 그 길을 걷고 싶다.
# 에코붓다 소식지 2014년 3-4월 호에 실린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