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적게 벌고 더 행복하기 | 윤태임

특집-에코보살 심층인터뷰
더 적게 벌고 더 행복하기

윤태임 | 서울 목동

김성균(이하 “김”) : 정토회와 인연이 된 계기와 언제부터 시작을 했는지 얘기해 달라.
윤태임(이하 “윤”) : 남편이 박사 학위 받느라고 외국에 가서 한 4년 살다가 시아버님이 많이 아프셔서 1996년도에 들어왔다.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데 병원 가는 길목에 ‘월간정토’ 사무실이 있었다. ‘저기가 뭐하는 덴가,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면서 ‘월간정토’ 스티커작업을 도와주기도 했다. 거기서 ‘월간정토’ 한 권을 얻어서 ‘조금씩 달라지는 삶, 깨달음의 길로 가보시지 않으시렵니까?’라는 책 속의 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왔다. ‘조금씩 달라지는 삶’ 그 문구가 너무 맘에 들었다. 다시 미국으로 가기 전에 ‘깨달음의 장’을 한 번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아버님이 일요일에 돌아가시고 그 다음 주 수요일에 ‘깨달음의 장’에 갔다. 4살 된 아이는 친정어머니한테 맡기고, 시어머니한테는 아버님 영가를 잘 모시고 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깨달음의 장’에 가서 많은 것을 얻었다. 예전에 학생운동도 하고 노동운동도 조금 했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사회활동을 계속 하는데 나는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빌미로 도망을 갔다. 근데 그게 죄책감이 있었는지 군인들한테 쫓겨 계단 밑에 숨어서 철문이 닫히는 꿈을 종종 꿨다. 그런 꿈을 꾸면 밖에 안 나갔다. 징크스가 생겨서 그런 꿈을 꾸고 나서 약간 우울증 증세도 있었고 뭔가 한 번 해 보려고 하면 잘 안 풀리는 마음의 갑갑함이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의 구분은 내가 노란 안경을 꼈기 때문에 세상이 노랗게 보이는 거구나’. 이것을 정말 잊지 말아야지’하고 다짐을

인터뷰하고 있는 윤태임님

인터뷰하고 있는 윤태임님

‘깨달음의 장’을 다 끝내고 나와서 크게 깨달은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의 구분은 내가 노란 안경을 꼈기 때문에 세상이 노랗게 보이는 거구나’. 이것을 정말 잊지 말아야지’하고 다짐을 하면서 문경 수련원의 길을 내려왔다. 그 당시 전두환, 노태우…그런 갑갑한 사회 현실 속에서 뭘 한 번 해보려고 하는데 힘이 부치니까 그냥 결혼을 빌미로 도망 나온 것에 대한 죄책감.. 이런 것들이 풀어진 것 같다. 그 뒤로는 더 이상 그런 꿈을 안 꿨다. 홀가분함이 정말 좋았다. 문경에 다녀와서 시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는데 금강경 책자가 나오길래 시어머니가 혼자 계시니까 그걸 읽으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케치북을 사서 금강경을 그대로 베껴서 드렸다.
그 당시 ‘월간정토’ 사무실에 계시던 묘수법사님이 ‘월간정토’가 든 가방 하나를 주시면서 미국에 가서 뿌려보라고 해서 일단 챙겨서 갔다. 미국에 다시 가서 달라진 점은 전에는 남편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오면 뭔지 모르는 질투심이 막 났다. ‘너는 여기 공부하러 왔지, 나는 뭐냐?’며 약간 화도 나고, 설거지를 할 때가 되면 ‘너는 왜 설거지 안 해!’ 이런 마음이 참 많았다. ‘깨달음의 장’에 다녀오고는 그 마음이 좀 없어졌다. 평온한 마음 상태를 유지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울지도 않고… 나중에 남편한테 물어보니까 내가 ‘깨달의 장’에 다녀오고 난 뒤에는 자기가 많이 편안했다고 하더라. 뭘 해줬으면 바라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유학생 부인들을 이 동네 저 동네 끌어 모아다가 국수를 삶아주면서 ‘깨달음의 장’에 다녀온 후 얻은 자유로움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스님 법문 테이프를 함께 듣고, 나누기도 했다. 초발심에 느낌들을 많이 나눴다. 그리고 정말 기적 같은 일은 엄격한 부모 밑에 자란 한 분이 애기가 안 생겨서 병원에 불임치료를 받으러 다녔던 아줌만데, 남편의 모든 행동이 불결하고 더럽다고 느껴졌다 한다. 이랬던 분이 스님 법문을 공부하면서 마음이 녹아져서 나중에 애기를 갖게 됐다.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생기고 그렇게 6개월 정도 생활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거길 떠나고 난 이후에 콜럼버스 법당이 하나 생기게 됐다. 그 6개월이 지금 돌아보면 내 생애의 큰 감동이다.

김 : 그 때가 시기적으로 언제인가?
윤 : 1996년에 ‘깨달음의 장’을 하고 한 97년? 서울에 와서 북한 동포 돕기를 시작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정토회 활동을 한 것은 97년부터다. 2차 천일결사도 시작했다. 새벽 기도 갔다 와서 밥해 먹고 봉사한다고 11시에 또 갔다가 끝나고 나서 저녁 해 먹고 또 저녁에 불교대학에 갔다. 집에는 밤 10시에 왔던 것 같다. 처음엔 진짜 신심이 나서 많이 했다. 큰 딸은 그 당시 4학년이었는데 엄마가 와서 밥 차려줄 때 까지 가만히 앉아서 밤 12시까지도 지키고 있었다. 스님 법문 공부 한창 할 때니까 큰 딸한테 참회한다고 108배를 하면, “그래, 며칠이나 하나 보자.” 이러고 자기가 지켜봤다고 하더라.

안 되는 건 안 되는 줄 알고, 내가 할 만큼은 요만큼이다… 하면서 나아가니까 잡생각이 많이 없어졌다. 이제는 복잡한 것들 속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다.

김 : 정토회 식구가 된 뒤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생활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윤 : 예전에는 내가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선물을 하나 하면, 내 성의껏 그냥 하면 되는데 내가 한 게 열이면 상대방은 스물 정도로 생각해주기를 바라면서 머릿속이 늘 복잡했다. 그런데 그런 성격은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도 그렇게 많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화나는 일도 참 많았다. 스님이 지나가시다가 “너는 왜 그렇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냐.” 이럴 만큼 감정의 기복이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뭔가 잘해보려고 하는 마음이 많았다. 그러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줄 알고, 내가 할 만큼은 요만큼이다… 하면서 나아가니까 잡생각이 많이 없어졌다. 이제는 복잡한 것들 속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다.

김 : 지금은 굉장히 편안해 보인다.
윤 : 예전에는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하는 것도 많았고. 남편도 다른 교수들과 비교해서 이렇게 돼야 한다는 것이 많았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가끔씩 나타나기도 한다.

김 : 어쨌든 간에 관계는 계속 변하신 것 같다. 정토회에서 또 중요한 게 환경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어땠는지, 사회생활 할 때에는 어땠는지, 내가 자연을 보는 눈이 어떻게 변했는지 말해달라.
윤 : 얼마 전까지 백화점에서 일을 했는데 ‘아…내가 아직 안 변했구나’ 느꼈다. 그리고 예전에 사회운동의 관점이 잘못됐었구나…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구별이 분명하다. 그래서 정토회에서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어떤 고집이 있어서 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서 살면서 ‘융통성이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내 삶에서 부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정토회 방식의 환경 운동을 접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남편이 약간의 우울증이 왔었다. 교수 생활을 하기가 힘들어서 그만 뒀는데 우리의 공통 목표인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적게 생활하자’ 라는 말이 그 당시 내가 절망에 좀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본격적으로 실험해볼 수 있는 상황이다’ 라는 식으로 반전이 되더라.

‘적게 먹고 적게 쓰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지를 이 기회에 한 번 해보자. 절호의 찬스다’

김 : 그 때 시기가 언제인가?
윤 : 2009년이었는데 그 때까지는 내가 매일 정토회에 상근하다시피 하다가 정리하고, 당장은 어디 다닌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가능한 시간제로 한번 해보자 싶어서 아파트 청소, 아는 집 가게 배달… 이렇게 시간제로 조금씩 하면서 몸도 마음도 힘들었는데 그 당시 내가 주인이 되게끔 지켜낸 것은 ‘적게 먹고 적게 쓰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지를 이 기회에 한 번 해보자. 절호의 찬스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재밌었다. ‘내가 오늘 얼마를 썼고, 우리 집 식구가 얼마를 먹고 얼마를 쓰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 마음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를 지켜볼 수 있는 참 좋은 시기였다. 단대부고의 급식실에 들어가서 하루에 4시간 정도 일하면서 빈그릇이나 환경실천이 어떻게 되는지를 볼 수 있었다. 거기서 8개월 있었는데 ‘빈그릇 운동’ 할 때 내가 그런 경험을 먼저 하고 운동을 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간절했다. 실제로 그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으로서 ‘야, 내가 운동을 그렇게 부족하게 했었구나’ 라는 게 정말 밥 먹는 애들의 심정을 잘 몰랐고, 빈그릇이 안 되는 학교 시스템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운동적 차원에서 했던 것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던 좋은 계기였다. 거기서 일 하면서 그 동안 살아왔던 것들도 검토해볼 수 있었다. 남편이 25년 간 꼬박꼬박 갖다 주는 돈만 갖고 나는 봉사활동을 했는데, 갑자기 바뀌어버린 남편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고 마음의 갈등도 해결해야 했다.

내가 그 동안에 환경 운동을 나름 실천해왔던 것들이 나를 지키는 버팀목이 되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었다.

그 당시 큰딸이 고등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중요한 시기였다. 애한테 내가 힘든 것을 티내면 안 될 것 같고, 머리가 좀 복잡해지더라. 그래서 월·화·수요일은 법회, 목·금·토·일요일은 성당에서 ‘술 문제 있는 사람들의 모임’ 이렇게 일주일동안 스케줄을 꽉 짜서 움직였던 그 때가 정말 치열하게 내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봤던 시기였다. 그 때가 참 좋았던 것 같고, 내가 그 동안에 환경 운동을 나름 실천해왔던 것들이 나를 지키는 버팀목이 되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었다. 이번에 백화점에서 일하면서 적응을 하는데 진짜 안 되더라. 화장을 해야 되고 염색을 해야 되고 옷은 유니폼을 입어야 되고. 그거 하나하나를 유지하는 게 너무 벅찼다. 9개월간 일 했는데 거기는 밥을 직원식당에서 먹는다. 거기 식당 밥을 먹다보니 너무 짜서 물이 많이 먹히고, 되게 피곤하고 좀 힘들더라. 그래서 도시락을 싸갖고 다녔는데 도시락을 먹으니까 편안하고, 힘든 것이 많이 없어졌다. 그래서 어떤 곳에 가서 적응이 안 될 때 일단 내가 나를 스스로 지키는 것은 환경적으로, 나 혼자 개인 컵 들고 다니고, 손수건 갖고 다니고, 밥도 싸갖고 다니고. 이렇게 저렇게 내가 내 생활을 정리를 해가면서 바깥 사회에 대처하는 힘을 좀 키웠던 것 같다.
인간관계는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것 같진 않은데 어쨌든 사람에 대해서 좋고 나쁜 분별이 없어지니 쉽게 다가가게 되고, 사람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게 좀 덜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김 : 질문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생겼다. 예를 들어서 학교 급식 하는데 빈그릇이 안 되는 시스템이고, 또 백화점에서 일을 하는데 생태적이지 않은 밥이라고 했는데 왜 그런지 알면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다.
윤 : 백화점은 일단 비닐을 무한정 공급한다. 투명한 비닐을 각 매장마다 원하는 만큼 공짜로 지급이 된다. 그러니 직원들은 손님들에게 무조건 모든 상품을 비닐에 넣어서 준다. 그러면 고객 카트에 비닐이 50장 이상 가는 경우도 많다. 거기서 일을 할 때 많이 걸리더라.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안 싸주고 싶은데, 같이 지켜야 될 흐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같았다. 또 백화점은 쓰레기들을 분리수거를 하지 않고 무조건 한 투입구에다가 버린다. 밑에 층에서 아저씨들이 분리수거를 하긴 하는데 큰 것만 분리를 하지 웬만한 건 다 일반 쓰레기봉투로 나간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10명 중 8명은 밥을 남긴다. 일단 밥을 먹으려고 할 때에는 배가 고프니까 많이 담고, 또 그걸 생각 없이 많이 남긴다. 백화점 들어가는 순간부터 ‘여기 빈그릇운동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생각을 했다가 결국 쫓겨났는데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많이 튄다고 보더라.

빈그릇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활용해서 업체와 학교를 대상으로 빈그릇 운동 교육을 시키고 그것으로 인해 절약되는 돈만큼 학교와 업체 반반 분담해서 교육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교통비하고 활동비를 지원하는 일을 구청 사업으로 하면 좋을 것 같다.

김 : 학교에선 어땠나?
윤 : 단대부고에서는 주로 설거지를 하고 뒤에 세팅하는 일이었는데 아이들은 무조건 남긴다. 먹을 만한 방울토마토도 열 알씩 식판에다 넣어주면 다 남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실제 먹는 양은 정말 적다. 내가 8개월 전에 처음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이 쓰레기양을 재어보진 않았지만 눈짐작으로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진 않았다.

학교에서 직접 운영하는 급식업체는 거의 없다. 학교하고 중간업체가 있고 학생이 있는데 중간업체의 입장에서는 부모님들한테는 말을 안들을 정도로 음식이 나가고, 학교 측에서는 조금이라도 싸게 단가를 자꾸 낮추니까 업체에서는 재료가 싼 것을 이용한다. 학생들이 2500명 정도 되는데 저녁까지도 식사가 나간다. 시스템을 뷔페식으로 바꿨는데도 거의 많이 남긴다. 토마토 같은 경우에는 먹을 만한데 일단 나갔다 온 거는 버려야 되는 게 원칙이다. 그래서 남긴 음식을 설거지 하려면 고속의 수도꼭지가 나와서 수압으로 드라이클리닝을 한다. 통에 쌓인 음식쓰레기는 바로 봉투에 담겨서 나가는데 진짜 어마어마하다. 통탄할 일이다. 거기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구청에서 우리처럼 빈그릇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활용해서 업체와 학교를 대상으로 빈그릇운동 교육을 시키고 그것으로 인해 절약되는 돈만큼 학교와 업체 반반 분담해서 교육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교통비하고 활동비를 지원하는 일을 구청 사업으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경험들을 이용한 직업이 하나 생겼으면 좋겠는데 아직 서울시에 건의하진 못했다. 나처럼 돈을 좀 벌어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들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백화점에서 일하는 아줌마들 대부분이 돈이 없어서 나온 아줌마들은 얼마 안 되고, 대부분은 남편이 버는데 부수입을 얻기 위해서 나온다고 하더라. 주로 쉬는 시간에는 혼자서 애니팡(게임), 증권 같은 것을 많이 했는데 놀라웠다. 퇴근해서 같이 차를 타고 갈 때 대부분 다 외면을 한다. 나는 그게 또 상처였다. 나는 사람들 만나서 빈그릇운동 얘기도 하고 할 말이 많은데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도 참 적응하기 힘들었다. 나중에 책방에 가서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책을 봤는데 그 때야 이해가 됐다. 그 사람들은 뭔가 감정적 교란이 싫은 거다. 나는 일부러 교란을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쑤시고 들어가야 하는 사람인데 교란이 되기 싫으니까 퇴근시간 출근시간 조차도 자기만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교란 받는 게 싫으니까 다른 사람한테 웃음조차도 잘 안주는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사회 속에서 참 다들 대견하게 살아가고, 환경적이지는 않지만 정말 식구들 다 건사해가면서 나름 잘 살아가는걸 보며 배운 점도 많았다. 동료 직원한테 “내가 어떠냐?”고 물었더니 “언니 좀 별나. 언니 앞에 오면 밥도 남기면 안 될 것 같다” 고 했다. 어쨌든 끝날 때 좋게 나오기는 했는데 그런 경험들을 했다.

김 : 이제 본격적으로 녹색소비에 대해서 물어보겠다. 윤태임님은 녹색소비가 첫번째로 써 있었다. 가능한 적게 사기, 재활용품 이용하기, 에너지 덜 쓰기 등 테마별로 좀 구체적으로 본인의 녹색소비에 대해서 말해 달라.
윤 : ‘적게 먹고 적게 쓰기’는 일단 내가 부유하게 자라지는 않아서 많이 써 본 경험이 없다. 백화점에서 일할 때 내가 열등감을 느끼려나 했는데 아니더라. 열등감을 느끼기 보다는 인형 같이 살더라. 상품권을 가져와서 돌려쓰고. 또 몇 푼 남겨서는 또 상품권으로 하고. 거의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종이 돈 갖고 놀았던 그 사회더라. 정토회에 있을 때에는 안 쓰는 쪽으로 실천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남편이 200만원, 250만원 주면 어떤 때는 모아서 되레 용돈을 300만원 줬다. 그 당시에는 남편이 돈을 잘 벌었지만 나는 돈을 안 쓴다는 차원에서 애들 과외도 안 시켰다. 우리 큰 애 같은 경우에는 대치동 살면서 과외를 거의 안했다. 나중에 수학 과외만 조금 했는데 학부모들이 우리 애를 구경하러 왔다고 하더라. 그래도 그냥 저냥 해서 갈만한 데 갔고, 둘째 도 언니가 그렇게 했으니까 과외는 아예 생각도 안하고 그냥 학교만 겨우겨우 다녔는데 그 당시에는 생활패턴이 그랬다. 무조건 안 쓰고 남는 것은 좋은 데 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은 남편대로 살고, 우리는 우리대로 해서 거의 옷은 물려 입었다. 근데 그 때와 지금이 뭐가 다르냐면 그 때는 내가 쓰려면 한 달에 100만원, 200만원도 쓸 수 있었다. 그래서 마트에 가면 주눅이 안 들었다. 왜냐면 내가 안 쓸 뿐이지 쓴다면 나는 저 카트를 다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내 자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안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잘 써야 되더라. 안 쓴 과정 속에서 우리 부부도 안 쓰면서 애들을 쓰지 않게 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체육대회 때 하얀 티가 필요하면 우리 애들은 당연히 “엄마, 하얀 티 좀 어디서 얻어와” 이러지 “하얀 티 사줘” 안한다. 그리고 지나가면서 재활용 물건을 보죠. 뭐 주워올 게 없나. 미국에서 지낼 때도 늘 주웠다. 미국은 차만 한 대 끌고 나가면 살림살이를 다 주울 수 있다. 미국은 지하창고 개방해서 가라지세일 한다. 그리고 벼룩시장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든 생각은 기본적으로 많이 사서 많이 버리는 거였다. 그래서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을 했다.

이 집이 창문이 많다. 창문이 많아서 좋다고 왔는데 겨울에는 너무 춥다.
12월 9일 처음 여기 왔는데 불을 때니까 너무 따끈따끈 했다. 연립에서 살 때에는 따끈따끈한 맛이 없고 미적지근했었다. 여기는 완전 한증막처럼 따끈따끈해서 세게 틀었다. 그리고 그 다음 달 나온 가스 값이 한 32만원. 그런데 여기는 워낙 춥기 때문에 그냥 온도를 낮춰놔도 보일러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스가 들어간다고 했다. 기본으로 나오는 게 적어도 17만원, 18만 원 정도 나온다고 했다. 돈은 없는데 이렇게 돈이 나가면 큰일이지. 우리 집에서 지출 비중이 가장 큰 것이 보험료, 세 명의 핸드폰 비.그리고 가스비였는데 다른 건 다 줄였는데 가스 비는 어떻게 줄일까 고민을 했다. 한 해는 춥게 살아봤고, 돈도 많이 내봤고. 여름철부터 어떻게 줄일까를 계속 고민을 했는데 창문 위쪽에 커튼을 박았다. 비닐을 치고 그 위에 헝겊을 댔다. 이렇게 해보니 가스비가 32만원에서 4만원까지 줄었다.

화분에서 음식물쓰레기를 퇴비화 하면서 화초를 동시에 키운다

화분에서 음식물쓰레기를 퇴비화 하면서 화초를 동시에 키운다

친정 엄마는 그 얘기 듣고 울더라. 마루는 물론 거의 냉방이다. 천 쪼가리를 얻어다 이어서 바닥을 전면 다 깔았다. 그리고 우리 집에 있는 게 온수 보일러다. 1인용짜리가 하나 있고, 와트 수가 40와트밖에 안 되는 제일 낮은 거 하나를 구비해서 자고, 나는 실험한다고 퇴근하고 오면 빨간색 물주머니를 끓여놓고 신체부위 어디에다 끼고 자면 따뜻할까 실험하고 잔다. 나름 실험이랍시고 호통을 쳐가면서 하고 남편은 몸도 안 좋고, 너무 차가우면 안 좋을 것 같아서 전자파 없는 온수 매트를 하나 샀다. 남편은 몸이 힘든 것도 있지만 정신적인 부분을 치유하는데 술 문제가 좀 있다. 그래서 예전에 술을 먹으면 소주 9병~10병까지 혼자서 먹었다. 죽으려고 먹는 거지. 그러면 눈이 완전히 풀려버리더라. 사람이 거의 맛이 가버리더라. 남편이 워낙 그래서 일단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다가 2주 정도 있다 나왔다. 그런 상태까지 갔었는데, 제일 고마운 것은 대치동 연립주택은 햇빛이 굉장히 조금 들어와서 낮에도 거의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웠는데 이 집에 들어와서는 햇볕을 받고는 엄청 자더라. 늘어지는 고양이처럼 엄청 많이 자고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회복해가고 있다. 남편은 학교 쪽 관련된 일은 일절 안하고 이제 논문을 쓰면서 자기 나름대로 일을 하겠다고 한다. 어찌됐든 그런 과정에서 마누라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거지. 그래서 얼마나 이혼하자고 생난리를 떠는지… 사람 마음이 멀어지니까 옛날에 부부였던 게 어떤 거였는지도 몰라. 완전 공포의 대상이야.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부터 나를 어떻게 하면 골탕 먹일까 그러는데 심지어는 회 뜰 때, 물고기가 된 것 같더라. 회 한 포 한 포 뜰 때 그 사람은 얼마나 공포에 떨었겠나… 그래서 사람이 꼭 두드려 패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화가 전달되고, 나에 대한 미움이 막 배어나올 때 그걸 받아내는 건 매일매일 수행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가난했기 때문에 그것도 짧은 시기에 회복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내가 상담사를 찾아가서 남편들 술 문제가 있는 아줌마들 모임에 나갔다. 성당 모임이었는데 그 분들을 만나서 1년 반 정도를 교육 받았다. 처음 갔을 때 거기 모인 여섯 명의 아줌마들의 80프로가 남편을 알코올 중독 병원에 보냈더라. 한 열 댓 번 보낸 아줌마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었다. 근데 그 아줌마들은 너무 예쁜 거야. 옷도 예쁘게 입고 화장도 하고 얼굴이 발랄한데 나만 제일 후줄근해서 깜짝 놀랐다. 교육을 받으러 다니면서 나는 조금씩 수행을 하고 매일 아침마다 절을 하고 남편 탓이 아니라 내 탓으로 돌리고 했기 때문에일 년 뒤, 나는 좀 편안해졌는데 그 분들은 계속 공부를 해야 되는 상태로 남아있더라. 병원에 갔다가 집에 다시 오면 또 몇 달 있다가 남편을 병원에 보내는 거지. ‘저 사람이 나를 때릴 것이다, 저 사람이 나가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라는 공포감이 한 달, 석 달 정도 되면 남편이 뭘 안 해도 막 소설을 써서 집어넣게 만들더라. 이게 뭐지?, 뭐지? 하면서 아…수행을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현대사회에서 마음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좋은 약을 먹고 좋은 기관에서 요양을 하는 게 아니라 없으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을 나누는 게 훨씬 더 빠른 치유법이 아닌가 한다

그때 참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돈이 없었기 때문에 외식도 할 수 없었고 쇼핑을 할 수도 없었다. 세끼 모두 집 밥을 먹어야 했다. 예전엔 외식 많이 했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본인 몸이 좋아지고, 애는 학교 갈 때 돼서 학교 가고 나는 또 이렇게 되고. 각자가 자기 생활의 영역을 잘 지켜나갈 수 있었다. 돈이 있는 아줌마들은 알코올 중독 병원에 보내려면 나라 보조 받아도 매달 최소한 8~90은 있어야 된다. 좀 형편 좋은 데 가려면 200만 원 정도 든다. 나는 돈이 없어서 보낼 수 없었지. 돈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한테 득이 된 게 있었다.
남편이 나에 대한 미운 마음이 조금씩 녹아나면서 엄청 추운 어느 날, 온수 매트를 옆으로 대주더라. ‘오늘은 여기 와서 자라’ 이렇게. 그래서 그 날 3년 만에 남편 옆에서 처음 잤다. 이제는 거의 예전의 남편으로 복귀를 했는데 아직도 술 먹으면 미운 마음이 드는지 ‘니가 그 때 나한테 그랬지..’얘기는 하지만 어쨌든 멀어진 사람 마음 돌릴 수 있는 길은 돈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적게 쓰면서 접촉을 하면서 녹아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에겐 그게 큰 교훈인 것 같다. 현대사회에서 마음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좋은 약을 먹고 좋은 기관에서 요양을 하는 게 아니라 없으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을 나누는 게 훨씬 더 빠른 치유법이 아닌가 한다. 술병은 죽어야 해결된다고 다 그랬다. 이게 고쳐지는 병이 아니고 다 죽어야 되는 병이라고 했는데, 남편이 덜 했기도 했겠지만 특별히 약 먹은 것도 없고 그냥 이렇게 살면서 나는 계속 보는 거지.‘저 사람 마음이 어떻게 돌아오나’ 하고. 특히 알코올 중독자들은 느낌이 냉하다. 새한빛병원에서 법륜스님 법문 테이프를 틀어주고 나누기 하는 걸 잠깐 했었는데, 4~50명 술 문제 있는 아저씨들이 모여서 법문 듣고 나누기 하고 했다. 그런데 다들 느낌이 참 냉하다. 외로움이라던지 고독감이 사무친 느낌이랄까. 하여튼 지내면서 보니 이렇게 없이 시골 가서 살고 하는 게 치료하는데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 : 물품 재활용하기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윤 : 나는 무슨 물건을 보던지 ‘이것으로 뭘 할까?’ 고민을 한다. 그게 참 재미있다. 백화점에서 일하기 전에 유기농 매장에서 잠깐 일을 했었는데 유기농 매장에서 일을 하면 상품이 들어있는 박스라든지 진짜 쓸 만한 것들도 많은데 일단은 분류해서 버려야 했다. 그래서 참 연구를 많이 했다. 박스가 오면 투명 테이프로 한번 되감아서 나중에 다시 한 번 재활용해서 쓰기도 했다. 같이 일한 친구들을 좀 번거롭게 했었는데 가장 크게 바꾸었던 건 비닐 대신 보자기를 사용한 것이다. 아무리 시장바구니를 갖고 오라고 해도 안 가져 왔다. 손님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사장님하고 잘 얘기를 해서 했는데 아는 손님들 중에 ‘집에 보자기 있으면 저희 주실래요?’ 해서 보자기를 가지고 묶었다. 양쪽에 끈을 묶어서 이효재 주머니같이 했다. 거의 2년 일하고 나올 때는 대부분 다 비닐을 안 쓰고 보자기로만 포장해서 줬다.

하여튼 재활용은 먼저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아직도 지나가다 쓸 만한 게 있으면 다 주워온다. 우리 집에 있는 건 거의 100% 다 주워온 것들이다. 하나씩 하나씩 주워 오다보니 지금은 거의 세팅이 웬만큼 됐다. 화초도 거의 다 버리는데 가져다가 키우면 살아난다.그렇게 재활용을 하고 있다.

김 : 요즘 ‘자발적 가난’, ‘청빈’ 이런 얘기가 사회적으로 되게 많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윤 : 책이 나왔더라. 「더 적게 벌고 더 행복하기」그 책을 읽어봤는데 만약에 내가 새로 직장을 구한다면 생활을 하는데 최소한 얼마가 있으면 가능한 지 생각부터 해봤다. 아주 최소한으로 잡으면 보험료, 통신비, 난방비, 식비 해서 한 120만원 들어가더라. 그래서 직장 잡을 때 한 120만 원 이상만 잡으면 된다. 120만원을 받으려면 주당 한 40시간 정도 하면 된다. 주 5일 근무하면 가능하다. 이렇게 사회 시스템에 내가 맞춘다.그러다 조금 더 돈이 필요하다 싶으면, 지난번은 하루 10시간해서 180만 원 받았다. 180 받으니까 정말 넉넉하다. 법당에도 돈을 좀 내야 하고…어쨌든 사회적인 시스템하고 내 시스템하고 맞추면서 한다. 남편 상태를 체크해야 해서 너무 돈 버는 것에만 빠져있으면 안되고 그런 걸 좀 배려해가면서 일하는 시간을 잡고 있다. 어쨌든 한 120만 원 정도면 우리 집은 그런대로 살 수 있다. 이렇게 잡아놓으니까 편안하다. 막연히 ‘내가 얼마가 있어야 되는데 당장 수중에 돈이 없다’가 아니라 ‘어느 정도 줄이면 되는구나’하고. 초반에는 한 80만 원 정도 갖고 썼는데 좀 쪼들렸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쌀도 주고 해서 어떻게 넘어가고 했는데 그러면서 느낀 것은 ‘아, 다 살아지는 거구나!’. 대신에 폼 잡을 수 있는 건 없는 거지. 누구에게 밥을 사준다든지, 폼 나게 기부를 한다든지.

분리와 재활용이 철저한 모습

분리와 재활용이 철저한 모습

낡은 부채도 간단히 새 것으로

낡은 부채도 간단히 새 것으로

백화점에서 일하면서 삼보수호비를 만 원으로 올렸다. 그렇게 내 생활을 조금씩 업그레이드 시켜가면서 사는 것도 재미있었다. 딸이 대학에 들어간 후에 “너는 이제 용돈 없다. 네가 벌어서 해라. 그리고 일단 대학 갔으니까 등륵금은 알아서 하다가 안 되면 우리는 문경으로 간다” 이렇게 세뇌 교육을 시켰는데 지금까지 2년 동안 딸아이가 장학금도 다 받았다.그래서 한 푼도 안 들었다. 그리고 용돈은 지인의 한의원에서 주말에 일하면서 번다. 남편이 말을 안 해도 큰 딸처럼 작은 딸도 본인이 시켜야하는데 못해서 마음이 많이 불편했는데 저렇게 생활을 잘해놓으니까 아빠도 마음이 편안한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 보지 말고 그냥 각자 자리에서 잘 살자, 그리고 아빠가 건강해지면 그게 제일 좋지 않겠냐고 했다. 그래서 그냥 편안하고 각자가 편안하다 보니까 지금은 그냥 잘 산다.
하여튼 적게 먹고 적게 쓰기에 내가 정말 얼마까지 쓸 수 있느냐를 솔직하게 체크를 해 놓으면 편안해 질 수 있었다. 돈이 적기 때문에 당장 사고 싶은 것을 못사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거는 요번에 못 사면 석 달 후에 산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크게 부족한 건 없다. 아직까지도 냉장고, TV 잘 버텨주고 있고 남편 몸도 병원에 안간 상태에서 그냥 잘 버티고 있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서로가 잘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연구하는 생활로 바뀌었다는 게 참 감사하다. 우리가 아침마다 공부하면서 ‘어떻게 그게 가능하게 되지?’ 하는 관점으로 바뀌었다는 것

최 : 돌이켜보면 이 에코붓다 프로젝트를 빈그릇운동 하고있던 시점에서 구상했던 것 같다. 그 때 윤태임님, 김월금님 강의 사례를 들으면서 저분들의 삶이야 말고 진짜 앞으로 모델이 될 텐데….없어서 안사는 게 아니라 있어도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가난하게 사는 이런 삶이야말로 보편화 되어야 하지 않느냐 이게 현인들이 한 이야기인데 실제로 우리 주변에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렇게 실천하시는 분 만나서 인터뷰도 해보고 싶고 정리를 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게 기억이 난다.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지금 윤태임님 입장에서는 쓸래야 쓸 수 없는 돈이고 정말 최소한의 필요한 만큼만 벌어서 사시는 분인데 일상적으로 소비가 필요한 때, 그러니까 사람을 만날 때. 특히 가족이나 친척을 만났을 때최소한 밥도 못 사주게 되는데 그러실 때 약간의 부담감이나 보시를 못했을 때 심적으로 어땠을까 하는 궁금함이 든다.
윤 : 연구하는 생활로 바뀌었다는 게 참 감사하다. 우리가 아침마다 공부하면서 ‘어떻게 그게 가능하게 되지?’ 하면서 연구할 수 있게 되는 관점으로 바뀌었다는 것. 집안에 돈 좀 써야 될 때가 가끔씩 있다. 그 때 한 번 돈이 왕창 나가면 내가 막 휘청거린다. 조카 둘이 졸업을 하니까 못해도 10만원 씩 두 번 주고 나니까 그 다음 달은 막 힘들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통장에서 십만 원하고 이만 원씩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최 : 누군가가 윤태임님에게 인생관이나 가치관은 뭐냐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을 줄 것인가?
윤 : 아직은 확고하지가 않지만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뭘까…나는 사회적 기업에도 들어가고 싶고 협동조합에도 들어가고 싶고 얼마 전에는 공유경제에 대해 들어보니까 사업 아이디어가 없더라. 이걸 갖다가 이윤을 남기고 이렇게 하는 거는 없더라. 그래서 ‘내 인생관은 뭐였지?’ 라고 생각을 하게 됐는데, 별로 없었다. 아침에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좀 주어지면 좋겠고, 한 달에 한 번 도반들과 자자 포살하는 정도. 매 주 법회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고, 정말 이렇게 그냥 간소해지는 것. 뭐 특별한 인생관은 없고, 조금 더 한다면 이번 주에 지리산 수련원 깨장 바라지를 신청했는데 거기서도 내가 뭘 한 번 실험해 보고 싶으냐면 ‘내가 과연 바라지를 할 수 있는 민첩함이 남아있을까?’이다. 내가 백화점에서 제일 떨어졌던 게 뭐냐면 나이를 먹었더라고. 뭘 하면 빨리 빨리 안 되고. ‘아, 여기에 있는 것이 내 욕심이구나’. 왜냐면 화장을 하고 날 가꾸고 이러는 것도 하던 버릇이 있어야 되는 건데 그래서 욕심인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해서 그만두라고 해서 알았다고 하고 그만뒀다. 이번에 공동체에서 살 때에도 ‘내가 과연 쫓아갈 수 있을까?’ 이것부터 또 한 번 실험을 해봐야겠다. 지난번에 저녁 반에서 회의를 했는데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잠시 봉사활동을 쉬다가 다시 들어온 봉사자들 중에는 ‘정토회가 나를 좀 이해 못한다’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있었다. 근데 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정토회가 당신을 맞춰줘야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거기에 맞춰야 한다’고. 정토회 안에서 활동을 할 수 있게끔 자기가 힘을 기르는 거라고. 그래서 인생관은 그냥 그런 정도의 힘을 키워서 같이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것 말고는 인생관은 별로 없다.

내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화합시키고, 둘이서 싸우면 한 사람 불러다가 맛있는 거 사주고. 이런저런 얘기하고 이러면서 계속 나 스스로 저 사람들하고 내가 소통이 되고 있구나

최 : 끝으로 한 가지만 물어보고 싶다. 에코보살 프로젝트도 우리 삶의 모델을 찾아서 정리를 해보자고 하는 건데, 일반시민들한테 우리가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그렇다고 수행을 해라,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윤 : 나도 고민이다. 내가 백화점에 뭘 하려고 왔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 문제 말고. 거기에 있는 언니들하고 지내면서 뭔가 내 마음이 불편했다. 왜냐면 난 잘나 보이고 싶은 거야. ‘난 너희들하고 다르거든’ 이 생각이 자꾸 드는 거야. 그러면 내가 본격적으로 뭘 추구하고 싶지. 이럴 때 인격적으로 좀 존경을 받고 싶어 하더라. 그래서 일단은 내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화합시키고, 둘이서 싸우면 한 사람 불러다가 맛있는 거 사주고. 이런저런 얘기하고 이러면서 계속 나 스스로 저 사람들하고 내가 소통이 되고 있구나 라는 걸 느꼈다. 나중엔 자기네 집 얘기 다 하고 자기 남편이 뭘 했단 얘기 다 하고 이렇게 되긴 되더라. 그런 것들을 계속 실험을 해봤는데 인격적으로 그런 모델?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어떤 식의 모델들이 만들어지듯이 그런 모델들이 되는 거?

김 :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말하는 것 같다.
윤 : 각자가 그런 인격체가 되는 거지. 그러고 아까 운동의 관점을 잘못 잡았다고 얘기했던 게 뭐냐면 내가 너무 터트리는 식의 운동을 했었다. 노동운동도 그렇고, 학생운동도 그렇고. 옆에 있는 언니들한테 백 번 이상 스님 법문을 보내줘도 답변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대학교 동창들에게 보냈을 때에도 거기서 내가 뭘 느꼈냐면, SNS가 다 그런 거라고는 하지만 ‘공감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거구나’ 나는 옛날에 공감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주먹으로 쥐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부터 해보고 나랑 비슷한 사람이 모여들 때 같이 나누어보고. 그럴 때 조금 확산을 시켜보고. 그렇게 보면 백화점 언니들한테 배워서 장아찌, 오이지도 담갔고 매실 장아찌도 많이 담갔다. 옛날에는 그런 거 몰랐다. 그런데 진짜 그 분들은 일을 하면서도 매실장아찌 담그고 오만가지 부모시대부터 해왔던 거 다 해먹고 있더라. 산과 들로 나물들을 따러 다니며 훌륭하게 자기 삶을 잘 끌어가고 있더라. 그래서 아까 말한 ‘이렇게 사는 사람이 없다’가 아니라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아’ 그런데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운동을 만들고 이러는 게 우리가 할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두북, 봉화, 지리산에 청정마을을 하나 만들어서 그 곳에 사람들이 와서 보고 나가고. 지내면서 쓰레기제로와 전력 줄이기도 해보고.그런 걸 하나 해보면 어떨까 싶다.

백화점 언니랑 얘기가 되면 한 명씩 데리고 법문 들으러 갔다. 그러면 자랑 할 만한 것은 결국 ‘저 사람이 우리 스님이다’가 아니라그 사람이 나를 볼 테고 법륜스님 제자라면 먹는 거나 뭘 잘 쓰는 지도 볼 테고, 회관에서 우리는 이렇게 한다고 보여줄 게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정토회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예전에합정동에 빈그릇 식당 있었는데 없어졌다. 정토회에서 그걸 다시 한 번 해보면 어떨까. 덕소에서 신도분이 농사를 오천 평을 지으신다. 그런데 쓸 데가 없는 거야. 그걸 계속해서 하시긴 하는 것 같은데 그 싸게라는 것도 거사님으로서는 어렵잖아. 그리고 회관에서 뭘 팔고 하는 것도 안 되고. 그래서 거기를 조금 더 세팅해서 농사를 짓게 하고, 보살들 중에 없는 사람들도 있거든. 그런 사람들이 거길 가서 농사를 짓고 돈은 안 받지만 농산물도 갖다 먹고, 식당을 개업해서 낮에 1시부터 2시까지는 빈그릇 식당 해서 돈 내고 먹게 하고 그 옆에는 재활용 매장 하나 하고 공정무역 카페 하나 하고 이런 센터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 사회적 기업이라든지 협동조합이라든지 정토회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모임이 있다니까 한 번 거기에 들어가서 내가 할 형편은 못되지만 세상 흐름을 구경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최 : 최근에 정토회 내에 계속 사람이 늘고 있다. 지역 법당도 늘고. 그래서 지역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어떤 분의 제안을 예로 들면 ‘한 곳에 모여서 하는 공동체는 모델이 만들어져야 되지만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법당에 와서 그냥 자원 봉사만 하는데 공동체로서의 삶도 꾸려볼 수 있게끔 실현도 해보자’ 이런 제안도 있다. 예를 들면 카쉐어링사업이나 공동구매도 할 수 있다.그런 것도 사업 구상으로, 환경 사업으로 정토회에서 지역단위로 시범사업으로 그 분들끼리 네트워크를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윤 : 실업급여를 받으러 가서도 교육을 엄청 시키더라. 신고해야 되고 구직활동을 위해서 상담, 심리검사부터 해서.. 그래서 이번에 한 번 해볼 참이다. 나한테 적합한 직업이 뭘까.. 그런 것도 있고 구청이나 이런데도 일자리센터, 지역사회에서 할 수 있는 마을 공동체, 이것을 어떻게 잘 연결을 하면 좋겠다. 이 집이 워낙 추우니까나는 무슨 생각을 했냐면 이번 겨울에는 난로를 놓아볼까, 이런 생각을 해서 보니까 마포 쪽에는 난로를 만들어서 보급하는 공동체가 있더라. 살면서 생기는 문제점들을 여러 명이서 머리를 맞대고 그게 좀 더 발전하면 사업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활동을 너무 안에서만 하지 말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도입을 하고. 공유경제도 얼마나 멋있나!. 집에서 남는 책, 남편 이사 올 때 경제학 책이 최소한 몇 백 권은 버려야했다. 집이 좁으니까. 근데 그건 또 일반 도서하고는 다르지 않나. 그래서 아름다운 가게로 보냈더니 그쪽은 쓸데가 있다한다. 그런 책들을 마을의 어느 공간을 마련해서 같이 다 공유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 여하튼 그렇게 할 만한 게 있지 않을까 싶다.

김 : 이제까지 질문에 답변해 주셔서 고맙다.

# 에코붓다 소식지 2014년 5-6월 호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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