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환경
불교와 환경
주지 않고 얻으려고만 하는 삶
법륜|에코붓다 이사장
설날 아침 부모님께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부모는 자식한테 ”그래, 너도 복 많이 받아라“한다. 이를 바꿔 말하면 ”부모님,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기만 하세요“이며, ”그래, 너도 투자하는 것보다 많이 얻기만 해라“하는 것이다. 부처님한테 복을 비는 것도 ”부처님, 항상 받게 해 주세요“하는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사람, 즉 ’범부중생凡夫衆生‘의 인생이다. 환경문제는 이러한 ’범부중생‘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
환경문제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부적 환경’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낀다. 왜 그럴까? 근본적인 이유는 ‘얻으려는 생각’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생각이 있는 한 우리는 노예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배우자에게 사랑을 받으려고만 할 때, 부모한테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동안 우리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해방되지 못한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神에게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는 순간, 신의 종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랑을 주려는 순간, 우리 자신이 바로 사랑이 된다. 누군가에게 베풀 때, 여러분 자신은 신이 된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주인이 되는 길이다. 어떤 장소, 어떤 시간이든, 또 무슨 일을 하든 그 자리에서 어떻게 임하느냐에 따라 주인이 되기도 하고 종이 되기도 한다.
누가 주인인가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가 불교 용어로 말하자면 ‘범부중생凡夫衆生’의 인생이다. 여기서 범부란 ‘어리석은 사람’이다. 바로 얻으려고만 하는 사람이다. 주지 않고 얻으려는 생각,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지면 ‘복福’이 있다고 말한다. 하루 종일 일하고 5만 원을 받으면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길 가다가 5만 원을 주우면 재수 좋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복福’은 ‘주지는 않고 받겠다, 하지는 않고 얻겠다’라는 심보에 맞추는 것이다. 삶이 괴로운 까닭은 다른 사람 때문에 혹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받으려고만 하는 어리석은 마음 때문이다.
두 번째 인생은 ‘받고 싶으면 베풀어라,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어야 오는 것이 있다’라는 태도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번째 인생 방식도 첫 번째인 ‘범부중생’의 어리석음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주는 만큼 받겠다는 생각 역시 근본적인 목적은 받으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고방식이나 두 번째 사고방식이나 근본은 모두 욕심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같다.
환경문제의 근원 역시 이러한 범부중생의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자. 우리는 자연을 위해 무엇인가 베풀어주고 보호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얻으려고만 하고, 쓰려고만 하고, 또 못 쓰는 것은 보잘 것 없다며 갖다 버린다. 이는 받는 것이, 쓰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소비수준을 한 나라의 발전의 척도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한 나라가, 한 가정이 얼마나 잘 사느냐를 따질 때도 소비수준을 기준으로 삼는다. 백화점에서 얼마를 쓰느냐, 혹은 전기를 1인당 몇 kw를 소비했느냐, 1인당 병상 수가 어떻게 되느냐, 심지어 페니실린 같은 약품도 1인당 얼마나 소비했느냐로 그 나라의 발전 정도를 가늠한다. 많이 소비하고 풍요롭게 쓰기 위해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인다.
자연, 주면서 받지 않는 삶
그런데 우리 인생에서는 위의 두 가지 인생 부류와는 차원이 다른 세 번째 부류가 있다. 그것은 ‘주고 받지는 않겠다, 받을 생각 없이 주겠다’라는 자세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바로 ‘자연’이 이러한 인생 유형에 속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고도 받겠다는 아무런 욕구가 없다. 우리가 자연을 파괴했을 때도 자연은 우리에게 보복하지 않는다. 오늘날 환경위기는 인간이 자연을 파괴해 화를 자초한 것이지 자연의 보복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자연은 우리에게 조건없이 베풀기만 했다. 그런데도 인류는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더 많이, 더 빨리 얻어내기 위해 땅을 파고 바다를 헤친다. 이제 그만 인류는 소비를 행복의 가치로 삼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그 욕망에서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 한다.
적게 소비하는 작은 삶이 나와 환경을 살린다
‘많이 쓰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은 고통의 철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환경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 때문에 필요와 욕구의 기준을 잡는 일은 환경운동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 필요의 기준을 나보다 잘사는 사람, 우리보다 잘사는 선진국을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 대신 나보다 어려운 사람,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생활 수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세계적인 기준으로 평균 이하의 생활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나라 중하위 생활 수준의 사람들이 우리 집을 방문한다고 했을 때 어떻게 여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적게 갖고 적게 쓰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할 때 환경 운동에도 힘이 붙는다. 그제서야 우리는 제 인생의 주인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주면서 받지 않는 자연의 삶에 다가갈 수 있다. 이것이 환경문제를 푸는 삶의 방식이다.